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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교제

이승신의 컬쳐에세이 - 1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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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3건 조회 7,256회 작성일 13-01-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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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3

면면히 이으리

그 날

제물포 항구에서

미국 이민선 갤릭호에 백 하나의 몸을 싣고

망망대해 태평양만 바라보다

마침내

1903년 1월 13일

그 황홀한 섬

하와이 호놀루루에 닿기까지

스므 사흘

내리 교회 크리스챤의 주축이

하와이 이민의 효시였고

미국 이민의 시작이었다

떠나올 제 그리던

풍요로움과 신교육의 열망

빛나는 하와이 햇살과 자연의 축복

그 하와이안 드림이

키를 훌쩍 넘는

사탕수수의 밭에서

부르튼 손가락과

피멍 손톱되어

서러움을 당할 제에도

어려움이 닥칠 제에도

믿음으로

고향 산천 그리며

한민족 특유의 근면함과 끈기로

참고 견디며 기도를 했었지

일제의 침략에 분노하고

진주만 공격에 떨었어도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넘기며

아 ~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흘리신 피땀과 눈물 어이 잊으랴

먼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간절함

후손들을 위한 희생

선교와 언제나

민족 운동의 핵심인 교회

그 무릎의 기도

밑거름 되어

이제

우리는 넘치는 축복을 누리나니

조국이 외치는 글로벌화 세계화는

이미 110년 전

제물포항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산천이 변하고

태평양 건너던

스므 사흘의 배가

10 시간 비행이 되었어도

우리에게 흐르는

대한민국의 피

한민족의 DNA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흐르는 믿음의 피는

언제이든 어디서든

면면히 이으리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좁아져

그 바다 1시간에 넘는다 해도

1903년

그 날

제물포 항구에서

가슴 깊이 품고 온

소중한 믿음의 씨앗 하나

그 귀한 사랑의 씨앗 하나

면면히 이으리

영원히 이어지리

하나님 안에서

송영길 인천 시장과는 고대 국제 대학원을 같이 다닌 적이 있다

정치인에게 약간의 편견이 있는 나는 클래스에서 그와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졸업식 날 식을 하고 내려 오다 캠퍼스에 있는 조지훈 시비에 멈춰 서게 되었는데 그 비석에 새겨진 '승무' 긴 시를 그가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 새삼 그를 쳐다 보았다

시를 좀 아는 정치인 송영길은 그 때 내가 시를 쓰는 지도 몰랐지만 그 후 내 시집이 나올 제마다 맘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감격해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인천 시장 선거에 그가 나왔고 보나마나 떨어지니 그런 거 절대 나가지 마라고 점쟎게 조언까지 했다

당선이 된 날 바로 전화를 준 것은 내 생각이 틀렸고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도 여전히 나는 인천에 안가본 게 30 년이 되었는데 그저께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천에서 한 무리가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이주를 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미국에 발을 디딘 첫 이민이었고 올 해가 110주년의 해로 그 축시를 써 달라고 자매 결연인 호놀루루에서 그 시를 낭송하게 된다고 했다

하와이에 대한 아련한 마음이 있긴 한데 ~ 몇 달이나 있다 하느냐고 하니 낼 모레 1월 13일로 지금 당장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련한 마음이 있다 ~ 라는 말을 듣자 그는 믿고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

긴 산문을 쓰다 시간 좀 줄여 본다고 단시로 쓰게 된 것이 그게 더 어려워 시간이 더 걸리는데

110년의 장구한 두 나라의 역사를 한 줄로 쓸 수도 없고 시를 좀 알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짓기를 강냉이 튀기는 것 쯤으로 생각하니 이걸 어쩌나 ~

거기에 원래의 스케줄에다 일본 제일 오랜 전통의 고단샤 시잡지 '단가연구'에서 단가시 10 수를 청탁 받아 짓고 일어로 번역해 보내야 하는 날도 같은 날이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인천에 안가 본지 30 년 와싱톤 뉴욕에서 방학 때 서울 집에 오려면 50 불을 더 내면 하와이에 stopover 가 되어 여러 번 하와이를 오고 갔지만 안 가본지 20 년이 되어 다른 일을 다 마치고 밤 1 시가 넘었는데도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아련한 추억이라는 것은 어려서 1904년 생인 할머니가 하와이의 신랑감과 사진 맞선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귀에 흘려 들은 적이 있다 이국적이고 하와이에 신부 신랑, 배를 타고~ 이런 말들이 뭔가 신비로운 이미지로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나 못한다고 잡아 떼면 110 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곤란할 것이고 이런 중대한 것을 이런 짧은 시간에 받은 것도 처음이어 어찌 해야 좋을 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사랑의 빚만 진 장복순 할머니 생각과 110년 전 나라에 흉년이 들어 무조건 배를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이국을 향했던 크리스찬이 주축이 된 선조들 그리고 미국의 삶 20 여년에 본 조국을 그리는 교민들의 그 심정을 한참 떠올리고 생각해 보며 태평양 바다를 건너 마침내 호놀루루 항구에 도착한 그들처럼 드디어 밤을 꼴깍 새워 새벽 4시 반에 위와 같은 71 줄의 장시가 나오게 되었다

이건 나에게 기적이나 같은 일이다

시험을 이겼다고나 할까

여기에 어려서 각인된 하와이 맞선 이야기는 빠져 있다

할머니가 당시 그 먼 이역만리에 가셨을 리 없지만 하와이에 시집갔다면 어머니도 하와이 태생이요 나도 하와이 태생이었겠다

틀림 없이 좋아하셨을 하와이를 한 번도 못 가보시고 가신, 첫 손주인 나를 지극 정성으로 길러 주신 할머니와의 추억은 그러나 내 가슴에 있다

할머니가 하와이로 시집 갔으면 좋았을 텐데 ~ 라고 상상해 보던 그 어려서의 아련한 추억도 내 가슴 어딘가에 아직 고이 남아 있다

 

등짝을 내리치는 땡볕 속 당시의 사탕수수 거친 작업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낸 자금 증서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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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

최치덕 장로님, 110년전 시작된 하와이 이민이 미주 이민의 물고를 튼 시발점이었음을 기억하면서 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110년전 인천에서 배를 타고 머나먼 하와이까지 와서 이민사의 씨앗을 뿌린 분들,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지금 한인 이민사회를 일구어낸 기초였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헌신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이민사회가 한층 더 성숙해지고, 우리 이민자들, 그리고 자녀들 가운데서 이 미국을 더욱 더 새롭게 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지도자들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약해져 가는 이나라의 신앙의 불길을 다시금 일으키는 영적부흥의 씨앗들이 우리 미주한인 교회들을 통해 뿌려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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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

그 시대에는 인천(仁川) 이라 하지 안했고, 제물포라 그러지도 안했고.  미추홀이라 그랬던것 같습니다.

인천이 처가집이 있기에.  그리고 인천에서 국민학교 3학년 ~ 5학년 중반 6월 23일 까지 학업을 했거던요.

지금은 인천 시에서도 한참 안에 있지만, 아주 옛날에는 바닷물이 "배다리" 라는곳 까지 들어 왔다고 하더군요.  월미도 도 지금은 매립을 해서  땅이  . 한덩거리 이지만, 아주 옛날에는 배다리에서 배를 타고, 월미도 까지 갔었다고 하더군요.  지금 신도시로 유명한 송도 국제 도시, 신도시도 제가 어릴때는 바다 였습니다.

인천도 많이 변했지요.  살다 보면 여기, 저기 너무 많이 변해서?  갈때 마다 놀랍니다. 아베베 인가? 1967년인가? 68년도에 인천에서 역전 마라톤을 했거던요. 하인천 역에서, 부평역까지 (그때는) 부평까증만 인천 이었습니다. 아마 그때쯤 미국에서. 아폴로 호로 달나라로 갔던 해 였던것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1968년?  그때 인천시 인구가 겨우 40만 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까지 300만 명이라 그러더군요. 인천시 인구는 2010년 현재 266만3000명(통계청 조사결과)으로 중구 9만3555명, 동구 7만8749명, 남구 41만8284명, 연수구 28만7351명, 남동구 49만5081명, 부평구 56만1058명, 계양구 34만4787명, 서구 43만3515명, 강화군 6만6883명, 옹진군(연평도) 1만9499명 임니다. 2025년도에는 380만명 정도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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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

잘 모르지만, 그 옛날에는 인천이 인천시 중구. 동구, 남구 이렇케  3 군데 밖에 없었던것 같애요.

연수구, 남구, 부평구, 계양구, 서구, 강화군, 옹진군. 북구 이런곳이 나중에 생겨 났어요.

그리고, 인천 영종도에 있는 인천 국제 공항이 어찌 어찌 하다보니, 인천시 중구 관할로 되어서,

인천직할시 (전에는 그냥 경기도 인천시 였음) 각 구청에서 제일 쇠까루 수입이 많아서. . 아주 좋다고 하더만요. 저는 인천시 중구 중앙동, 그리고 신흥동에 아파트와 쬐맨한 상가 건물이 하나 있어서, 중구청의 혜택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한 예로.  돈이 얼마나 많기에?  해마다.  중앙동 건물 Side Walk 보드 블락을 새것으로 교체 하더만요.  갈때 마다.  Side Walk 가 모양이 달라요.  왜 해마다. Side Walk 를 교체 하는지?  저는 참 이해가 안됩니다.  박물관, 예술관. 무슨 야외 무대, 청소년 회관. 예술의 전당, 시민회관 그런것 도 왜그리 많은지?  아무도 안 가요?  가 보면 . . 썰렁하고, 구경꾼도 없는 무슨 역사관,  달동네 박물관, 예술원. 예전에 인천 시청 자리에 중구청이 들어 썼는데, 건물 사이즈가 인천 시청보다 훨씬크거던요. 이것 . 저것 쓸데 없이 국고를 낭비해요. 그래서, 송영길 시장도 맘에 안들고, 그전에 시장했던분들 3~4명도 영 맘에 안들어요.